‘Alone Together’는 현대의 논리다.

이미지

2014년에 찍힌 위의 한국인 아이들은 모여서 컴퓨터로 게임을 한다. 이는 Alone Together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이에 관해서 Sherry Turkle은 TED에 초청받아 강연을 했었다. 아래의 번역된 연설문은 이 현상을 잘 설명해 준다.

조금 전에, 제 딸 레베카가 응원의 문자를 보냈죠. 딸의 문자는, “엄마, 완전 멋질거야” 너무 좋아요. 이런 문자를 받는 건 마치 포옹을 받는 것과 같아요.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역설을 그대로 보여 주고자 합니다. 저는 문자를 좋아하는 여자이지만, 너무 많은 문자를 주고 받는 건 문제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합니다.

사실 딸의 응원 문자가 제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는데요. 1996년, 제가 제 첫번재 TED 강연을 했을 때, 레베카는 5살 이었죠. 그리고 당시 요앞에 앞 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인터넷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해 자축하는 책을 썼고, 와이어드(Wired) 잡지의 첫 표지에 제 얼굴이 실리기 직전이었어요 그 정신없던 시절에는, 우리 모두 채팅방과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것들을 경험해 보고 있었어요. 우리는 우리의 다른 면들을 살펴보고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우리는 인터넷 접속을 끊었어요. 저는 기뻤어요. 심리학자로써, 저를 그렇게 흥분시킨 것은 우리가 이 가상 세계에서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배운 것들을 활용하여 실 세계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2012년으로 빨리 돌아와보죠. 저는 여기 TED 무대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딸은 20살이고, 대학생이죠. 딸아이는 휴대폰을 끼고 잠을 잡니다. 저도 그렇죠. 그리고 저는 새로운 책을 하나 썼어요. 그렇지만 이 책을 쓴 덕에 와이어드 잡지의 표지 모델로 오르진 않을 거 같네요. 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저는 아직도 기술이란 것에 매료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기술이란 것이 우리가 원치 않는 곳에 우리를 데려다 놓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지난 15년간, 저는 모바일 통신 기술에 대해서 공부해 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요, 온라인 접속에 대해 젊은 친구나, 나이든 분들도 포함합니다. 그리고 제가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주머니 속에 있는 이 작은 기기들이 정신적으로 매우 영향력이 커서 우리가 해야할 것을 바꾸는 것은 물론 우리가 누구인지도 바꾸게 됩니다. 그런 기기들을 가지고 우리가 했던 행동들은 불과 몇년전에는 이상하고, 신경쓰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이 너무나도 빨리 친숙해져 버렸죠, 우리가 어찌 한것 처럼요.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은 회사 회의중에 문자나 이메일을 보냅니다. 사람들은 수업시간, 발표시간, 거의 모든 회의중에 문자를 하거나 쇼핑하러 페이스북에 들어가죠. 사람들은 문자 메세지를 보내는중에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중요한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 말하곤 합니다. (웃음) 이런 기술은 어렵지만 결국은 해낸다고 말하곤하죠. 아이들이 아침식사나 저녁식사중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중에서도 부모는 문자나 이메일을 보냅니다. 이렇게 불평했던 아이들도 사람들간의 대화에서 집중하지 않습니다. 이 사진은 제 딸과 친구들이 함께 있지만 각자 따로 놀고 있는 모습니다. 우리는 장례식에서 조차도 문자를 합니다. 저는 이걸 연구했죠. 사람들은 애통하거나 묵념하는 대신 전화기를 집어듭니다.

그럼 그런 행동이 왜 문제가 될까요? 이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 그런 곤경은 서로서로에 영향을 주고, 우리 자신 스스로와 자기반성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연관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함께 외로워지는 새로운 방법에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 함께 하기를 바라고 어디에서 함께 있기를 바라죠. — 서로 다른 장소에서도 연결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바꾸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있었던 모든 장소에 들락날락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대부분의 일들은 사람들이 집중을 하게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의에 참석하기를 원하더라도, 여러분들에게 흥미있는 사안에만 집중을 하게됩니다. 어떤분들은 그런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게하면 상대방에게 우리가 항상 온라인으로 연결되었을지라도 자신을 상대방으로 부터 숨기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죠,

50세의 한 사업가분이 직장에서 자신은 더이상 동료가 없다고 저에게 한탄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직장에가서 누군가에게 말하려고 멈추거나, 전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동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왜냐하면 직장 동료들이 이메일을 보느라 정신 없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제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실을 말하지 않을겁니다.” “저도 방해 받고 싶지 않은 사람중에 한명이니까요.” “저는 제 블랙베리(휴대폰)로” “뭔가를 하는게 나을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저는 서로 떨어져 있어 만남을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한 암만 실컨 사귀어도 끝이없는 관계들을 목격해왔읍니다. 저는 이걸 골디락 효과라고 말하는데요: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고, 딱 적당할 만큼만요. 그렇지만 그 중년의 사업가분에게 딱 적당한 것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관계를 배워야하는 청소년들에게는 문제거리일수있읍니다. 모든것을 휴대폰 문자로 보내는 18세 소년이 다소 동경스러운 목소리고 저에게 말하더군요.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구요.” “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제가 사람들에게 “대화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어요?”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화는 현재에 발생하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제어 할 수가 없는게 문제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휴대폰 문자, 이메일, 온라인 게시판 글쓰기, 이런 모든것들이 우리가 원하는데로 자신을 표현하게 해줍니다. 수정하고, 그러면 삭제도 되고, 꾸밀 수 도 있고 얼굴도, 목소리도, 육체와 몸도 말이죠. — 많지도 적지도 않게 말이죠, 딱 맞게 말이죠.

인간 관계란 무궁무진하고 복잡합니다. 그리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린 기술로 지저분하거나 어려운 부분들을 치워 버립니다. 그렇게 기술이 인간관계를 정돈정리 할때, 일어날 한가지 사실은 우리는 단지 연결을 위해서 대화를 희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빚을 진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신경쓰지 않게 된것이죠.

스티븐 콜버트가 저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질문을 했을때 저는 놀랬습니다, 그 질문은, “조금씩 트위트하는것, 찔끔찔끔 언라인으로 의사소통하는것을 다 합하면 크게 한모금 꿀꺽 마시는 실제 대화에 맞먹는 것아녜요?” 제 답은 “아니요” 였습니다. 말이 안되죠. 온라인에 조금씩 접속해서 단편적인 정보를 수집 할 수는 있겠죠, 예를들어,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또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가 이런 문자 메세지를 제 딸에게 받았을 때, 제가 어떻게 느꼈는지 보세요. 그렇지만그런 방법들은 정말 서로를 알고 이해하고, 배우는데는 효과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활용합니다. 그래서 대화를 피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반성의 능력을 적당히 타협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요, 대화의 기술은 성장에 있어 주요 기반이 됩니다.

제가 끊임없이 듣는 말이, “말하느니 그냥 문자할래요.” 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는것은 사람들이 실제 대화를 잃어버리는데 익숙해져 간다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부실함에 익숙해지다보니, 아예 사람들과 함께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예를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소원을 저에게 말합니다, 애플의 아이폰에 내장된 음성인식 프로그램인 시리(Siri)가 언젠가는 제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죠,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을 때, 누군가는 들어줄 그런 친구 말이죠. 저는 이런 바램이 제가 지난 15년간 알아왔던 불편한 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내말을 들어주지않는다는 느낌이 우리의 기술문명에의 의존에 매우 중요관련이 있읍니다. 그래서 페이스북 페이지나 트위터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이유죠. — 그런 서비스는 결국 자동 청취자가 되는거죠. 아무도 내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느낌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 신경써주는것 같은 기계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합니다.

사람들은 로봇을 만들고 있는데요, 소셜 로봇이라고 부르는데, 친구노릇을위해 특별히 고안되었습니다. — 노인분들이나, 아이들, 또는 우리를 위해서 말이죠. 사람이 친구가 되어 주는것에 자신감을 잃어 버린건가요? 제가 이 연구를 하는동안, 양로원에서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곳에서 노인분들에게 그분들이 이해받는다고 느끼게 하기위해 만들어진 소셜 로봇들을 가져가 보았습니다. 하루는 제가 갔더니 아이를 잃어버린 한 여성이 어린 바다표범 같이생긴 로봇에게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어요. 대화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더군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경험이 없는 기계로 그녀의 인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 입니다. 그 로봇은 대단한 공연을 했던거죠. 우리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가상의 감정이입을 마치 실제인것 처럼 경험 합니다. 그래서 그 여성이 가짜공감을 경험하는 동안 “저 로봇은 공감할 수 없구나” “죽음을 맞아 본적이 없지.” “삶을 알리가 없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여성분이 로봇 친구로부터 위로받는것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대신 저의 15년간의 연구동안 가장 비통하고 복잡한 순간을 대했읍니다 제가 그만둘때 쯤, 저는 제 자신이 아주 춥고, 고난스러운 피할 길 없는 폭풍상황에 맞닥뜨린것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기술은 더 바라지만, 사람들 서로에 대해서는 덜 기대합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저는 기술이 사람들에게 가장 취약한곳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정말 나약합니다. 사람은 외로우면서도 친밀함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소셜 네트워크에서 소셜 로봇까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우정이나 인간적인 관계의 도전거리없이 환상의 친구를 공급해주는 기술을고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편안하게 조절할수있는 방법으로 서로를 연결하는 기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잘 제어하고 있지 못합니다.

요즘은 우리 주머니속에 있는 그런 전화기들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바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기들은 우리에게 세가지의 만족스런 환상을 주기 때문이죠. 하나는, 우리의 관심을 어디라도 가져다 줄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항상 우리말을 들어주죠, 세번째는, 결코 혼자가 아닌것 처럼 느껴질껍니다. 그리고 이 세번째 생각, 항상 혼자가 아니다라는 생각말이죠, 이 생각이 우리의 정신력을 바꾸는 주요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잠시라도 외롭다고 느끼면, 짜증나고, 혼란스럽고, 안절부절 못하기 때문에, 이런 기기들을 만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계산대나, 신호등이 빨간불 일때를 생각해보세요. 외로운것은 해결해야할 문제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해결 하려고합니다. 하지만, 그 연결이라는 것은 치료라기 보다는 증상이라고 봐야합니다.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것은 중요 문제를 포현 할 수는 있으나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증상보다 더한것은, 지속적인 연결은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게 합니다. 이것이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만듭니다.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하는 말이, “나는 공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들을 공유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정의합니다. 바로우리가 생각하는 순간에 말이죠. 이전에는요, 하고 싶은말이 있으면, 전화가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 문자를 보내야만 합니다. 이런 “나는 공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새로운 체계의 문제는 소셜 네트워크와 같은 연결이 없다면, 우리가 자신처럼 못느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의 못느낍니다. 우리가 뭘하나요? 우리는 더 많은 연결을 하고 삽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 스스로를 고립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연결에서 고립으로 갈까요? 여러분들이 자립하기위해 고독을 활용하고, 혼자 설 용기를 일으키지않으면 결국 고립되게 됩니다. 고독은 여러분 스스로 찾을수 있는 곳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가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과 애착을 형성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독할 만한 능력이 없다면 덜 초조하거나 살아있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기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감사할 줄 모르게 되는 거죠. 그건 마치 깨지기 쉬운 연약한 자신감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부속품 정도로 생각하는겁니다. 사람들은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 덜 외롭게 만든다는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혼자일 수 없다면, 더욱 더 외로워 집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혼자됨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은 외로워지는 방법만을 알게 될겁니다.

제가 1996년에 TED 강연을 했을 때, 초창기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컴퓨터 모니터상에서 “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자기성찰의 정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제가 지금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성찰, 그보다 더,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에 대한 대화, 우리가 무엇을희생하고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기술에 폭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두렵습니다. 처음 연애하는 사람들처럼 너무 많은 말로 연애를 망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과 함께 자라서 이제는 모두 성장한걸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아직도 초년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어떻게 만들지를 다시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많은 기계들을 쓰지 말자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기술을 가지고 서로서로가 스스로를 위해 자각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가지 과정을 생각했습니다. 고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독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봅시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재산으로 고독을 보여 줄 수있는 방법을 찾아봅시다. 집에서 성스러운 공간을 만드는겁니다. — 주방, 거실 등 말이죠. — 그리고 아이들을 교화시키는겁니다. 직장에서도 똑같이 해보세요. 일터에서, 서로 의사소통하기 바뻐서 생각할 시간이 종종 없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말할 시간도 없습니다. 바꾸세요. 가장 중요한건, 서로서로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지루한 것들조차도 말이죠. 우리가 휘청거리고 무슨말을 해야할지 모르거나 머뭇거릴때,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는겁니다.

기술은 인간의 연관성을 재정의 하려고 노력을 기울이죠. —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말이죠. — 하지만, 기술은 또한 우리의 가치와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저는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이제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는 서로가 있읍니다. 그리고우리는 나약함을 알면,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성공의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이 뭔가 복잡한걸 가지고 더 간단하게 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을 듣습니다.

저는 일하면서, 인생은 어렵다고 들었죠, 사람의 관계는 위험으로 가득차구요. 그리고 기술이 있는데요.– 간단하고, 희망적이죠, 긍정적이고, 영원할것 같은 기술이죠. 마치 구세주를 부른것 같죠. 광고 문구에는 온라인의 아바타를 가지고 “온라인에서 “ “친구들과, 자신과 그리고 인생을 “ “사랑하세요.” 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과 비슷한 컴퓨터 게임속의 가상 로맨스나, 로봇들이 언젠가는 친구가 될것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술집에가서 친구들과 이야기하지 않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모든것을 소비합니다.

하지만 그런 환상은 우리를 희생하게 합니다. 사람들 모두가 기술이 우리를 진짜 인생과, 우리 신체, 커뮤니티, 정치, 우리가 사는 지구로 돌려 놓을 수 있는 많은 방법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활용 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합시다, 우리가 사랑 할 수 있는 인생을 만들 수 있는 꿈의 기술말입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Advertisements

중2병은 고대에도 있었다?

때때로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서기관들은 점토판에서 서명이나

날짜를 새길 때 유별난 쐐기문자를 사용했다. 이런 끝처리 방식을

‘책 끝의 장식’이라 부르는데, 당시에는 이런 형식이 관례적으로 쓰였다.

그리고 평범한 기호를 유별난 기호로 대처하는 것은 비밀유지를 의도하기보다는 후대에 필사본을 만드는 사람에게 쐐기문자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까다로움은 현대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철자법은 이미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가들이 “5월 25일에 도착한 당신의 편지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지난달 25일에 도착한 당신의 전갈을 수취했다는 승인을 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남학생들이 짧은 단어 대신 일부러 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유사한 점을 갖는다. ” 

                                              – 데이비드 칸, 코드브레이커 109pg –

허세는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가 있었을때도 그리고 현재에도 있는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인듯 하다. 이런 맥락에서 중2병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인간은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지식을 자랑했다물론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와는 매우 다른 거지만,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인간이 어떤

허세를 부리고 어느정도 허세를 부리는가에 대해선 개인차가 있다.

  

 

 

세계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

나는 인식의 저편에 있는 것들을 무시했다.

그것이 나의 실수다.

그것들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어서 어떤것이 진실인지

구분해 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진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실용성에, 아니 자신의 이득과 편리함을 최대로 충족시키는

것에 두었을때, 나는 생각했다.

결국, 일관성이 없는 이해따윈 진실이 아니며 단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갖는 망상일 뿐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망상을 역이용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뿐, 나는 세계의 겉표면에 있는 것 만을

보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갖는 세계에 대한 이해따윈 어찌되도

좋았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극히 ‘피상적인 것들만’ 보는 인간이 된 것이다.

세계가 돌아가는 ‘보이지 않는’ 길들이 나에겐 보이지 않았고

그것은 내게 인식의 불편을 주었다.

즉, 나는 불만을 품었다. 나는 스스로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겉표면만이

아닌 그 저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치 혹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저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컨셉만드는데 필요한 상식.

컨셉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이미지들을 한곳에 모아 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무드보드가 필요하다.

 

시간과 금전적 지출을 줄이기 위해 무드보드는 온라인으로

할 것을 선택하길 바란다. 프린트해놓고 오려놓은 그림들 붙이려다 멈칫하면서

그걸 붙이면 재배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테니까, 애초에 그런짓은 하지마라.

만약 무드보드가 제출해야할 것이 아닐경우 더더욱.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라고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말했다는 걸, 은교에서 읽었다.

고작 그정도가 최대의 행복이라면, 연애는 행복을 얻기위해 하는 행위가
아닌거구나 하고 나는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에게, 고작 그게 다야?” 가
내 감상이다. 뭐, 연애는 현실적인 현상으로, 연애에 대해 기대하는 만큼
자신에게 손해라는 생각을 잠깐해본다. 그리고 뭘 새삼스럽게 연애에
환상을 품을까 하고도 웃는다.

문학에서까지, 층위를 제멋대로 나누어놓고, 모든 작가 작품을

마치 공산품 품질 표시를 하듯 표시해서 칸칸마다 나누어

몰아넣으려는 듯한 지식인 독자들의 일반적인 습관에 나는

경멸감을 갖고 있었다.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문학을 떠나면

폭력적인 그 편견은 더욱 두드러진다. 모든 장르에 걸쳐 메이저,

마이너리그가 있고, 양아치로 취급받는 아웃사이더 그룹도 있다.

스포츠처럼 정당한 시합에 따른 철저한 기록 분석으로 나뉘는게

아니다. 더러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현상’을

단서로 ‘내용’ 전체를 분류해버리고, 대중의 호응을 유도하여 그

분류의 정당성을 가짜로 확보, 굳히기 과정을 거친다. 그러고 나면

어떤 층위에 분류되어 넣어진 자는 아무리 변화를 꿈꾼다 해도 거의

평생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쉽다. 이를테면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그런 식이다. 그들의 분류 기준이란,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대개는 전근대적 ‘양반의식’이 이월상품처럼 전이돼온 것이다.

나는 멍청하지 않아, 일찍 그걸 알았고, 오히려 활용했다.

평생 오로지 시만 썼다는 게 무슨 자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혼자 살았다는 게, 필명이 적요라는 게 무슨 카리스마인가.

그러나, 우리 풍토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의 시작에 붙어 놀라운

성과를 확대 재생산해낼 수 있었다. 시인으로 살아남기를

꿈꾸었기 때문에, 내 시의 가치를 전략적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부도덕하지 않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편견으로 가득 찬 지식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야유의 한가지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내 성공에 대해, 그 무렵 자학적인 묘한 감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도데체 내 시가 그만한 존경과 흠모를 받아서 마땅한가. 내 시에 대한

대중의 존경과 흠모는 우리 사회의 미묘한 관습들을 재빨리 간파해서

반어적으로 부응함으로써 얻은 과도한 전리품은 아닌가. 사람들은

나의 시가 ‘우주적인 고요’에 닿아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세속적 욕망을 단호히 절제하고 ‘오로지 시만 써온 지난한 과정’에서

얻어낸 빛나는 성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평생 구도하듯이

혼자 살았다는 것도, 잡문 한 번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물론 회자됐다.

나의 입장에서, 그런 평가들은 나의 전략에 머리 좋은 자들이 놀아난

결과에 불과했다. 나는 그래서 혼자 앉아 속으로 말하곤 했다.”

” 엿 먹어라! ”

육십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의 ‘엿 먹어라’는 대중들이 나를

숭상하도록 줄기차게 도와준 머리 좋은 병정들, 일부 지식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변화가 마침내 찾아왔다. 육십대

중반부터 불현듯 나의 ‘엿 먹어라’가 그 칼끝을 나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시에게, 나는 ‘엿 먹어라’ 했고,

내 자신에게, 또한 ‘엿 먹어라’ 했다. 매우 자기모멸적이고 위험한

자의식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세상을 향해, 내 시가 알고 보면

우주의 털끝도 건드린 바가 없고, 적요라는 필명도 전술적으로

준비된 도구에 불과하며, 심지어 혼자 살아온 것조차 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소리쳐 말하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다.

– 은교 141~144pg –

“낱말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의 간격은 때로 저승과 이승만큼 멀거든.”

” ‘처녀’라는 어휘가 얼마나 신비한지 너는 모를테지.

시간의 장애는 이럴 때 나타난다. 어떤 낱말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의 간격은 때로 저승과 이승만큼 멀거든.

가령 네게 연필은 연필이지만 마음 놓고 공부할 환경을 살지

못했던 내게 연필은 눈물이다.  “할아부지, 제 연필좀 깎아주세요”

라고 네가 말하면 나에겐 그 말이 이렇게 들린다. “할아부지, 제

눈물 좀 닦아주세요. ” 단언컨데, 너와 나 사이에서 이보다 큰 슬픔은

없다. 마찬가지로 너에게 처녀는 처녀일 뿐이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처음이고 빛이고 정결이고 제단이다. 예로부터 신과 소통하는 신관도

‘처녀’이고 신께 바쳐지는 제물도 ‘처녀’였어. ”

– 은교 94pg –